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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래잡기, 축구를 하다 보면 하루해는 너무나 짧았고 특히 겨울에는 어두컴컴한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현관문에 들어서면 가스 불 위에서 끓고 있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부엌에서 바쁘게 일을 하시다가도 문가에 들어선 나를 보기라도 하면 모든 일을 멈추시고 물 묻은 손으로 마중 나오셔서 환하게 웃어주셨던 어머니. 그리고 어서 씻고 밥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그날은 조금 일찍 집으로 들어갔는데 형과 누나는 기말 시험 준비 때문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서 집에는 오늘 따라 나 혼자 있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신 어머니는 바쁜 손놀림으로 이것저것 준비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놀다가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고 있던 나를 부르셨다. 아마도 맛있게 끓일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계셨는데 냉장고를 열어보니 두부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보고 저 앞에 있는 가까운 가게에 가서 두부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날따라 많이 피곤하셨는지 약국도 들러 피로회복 드링크제를 사오라고까지 부탁하셨다. 아직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웬만하면 심부름을 잘 시키지 않으셨는데 형과 누나가 집에 없어 부득이하게 내가 가게를 다녀오게 되었다.

 

심부름 값을 들고 밖에 나섰는데 잔뜩 흐리고 어둑어둑해진 하늘 위로 함박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엄청나게 퍼붓는 눈 때문에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날에는 길이 미끄럽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조심조심 가게에 가서 두부 한모를 사고 약국에 들러 비타민 드링크제를 샀다. 눈이 내려 평소보다 시간은 오래 걸렸고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집안 식구를 위해 심부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뒤뚱뒤뚱 걷던 나는 언덕배기 길에서 그만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한 손에는 두부, 한 손에는 피로회복 드링크제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것들 모두 시멘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입었던 바지는 찢어지고 무릎도 약간 까졌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더욱 걱정이 된 것은 심부름으로 샀던 물건들이었다. 부드러운 두부는 네모난 형태에서 으스러진 모습으로 갈라졌고 병에 들었던 드링크제는 금이 가서 질질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쩌다 한번 심부름을 시켰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길바닥에 넘어져 울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집에 가면 보나마나 어머니에게 크게 혼나겠지만 그래도 서둘러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헝클어진 두부와 드링크제를 조심조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얼마나 부끄럽던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여느 날과 똑같이 어머니는 심부름은 잘하고 왔니?” 물어보시면서 나를 맞아 주셨는데 옷에 묻은 흰 눈도 제대로 털지 못한 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보시곤 깜짝 놀라시며 물었다. “민준아? 도대체 무슨 일이니? 왜 그런 거야? 어디 다쳤어?”라고 물으시다가 눈발이 거세게 흩날리는 바깥 날씨를 보시더니 그제야 모든 상황을 아셨는지 잠시 동안 가만히 서계셨다. 나는 그만 무안하고 미안한 나머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들고 온 두부와 드링크제를 현관 앞에 내려놓으시더니 가만히 나를 안아주셨다. 그리고 다정스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괜찮아. 오다가 길이 미끄러워 넘어졌구나. 많이 놀랐지? 어디 다친 데는 없었니? 엄마가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네. 이런 날에는 엄마가 직접 갔어야 했는데. 미안해. 이런, 우리 민준이 무릎이 약간 까졌구나. 엄마가 금방 약 발라줄게.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내 새끼.”

 

많이 혼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심부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나를 꼬옥 끌어안고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는 깨져서 줄줄 새는 드링크제 바닥에 남아있는 노란 영양분을 컵에 따르시고는 다른 이물질이 섞이지 않았는지 눈으로 확인하시곤 한 모금 드셨다. “우리 아들이 사온 거라 그런지 이렇게 조금만 마셔도 엄마는 힘이 펄펄 나네.. 고마워. 아들.” 아들의 기를 죽게 하지 않으려고 어머니는 내 앞에서 조금 밖에 남지 않은 드링크제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날 저녁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 오른 된장찌개에서 두부는 네모난 모습이 아닌 울퉁불퉁 갈라진 모습이었다. 두부를 수저로 집어든 누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라. 엄마, 왜 이렇게 두부가 반듯하지 못하고 이 모양이야. 맛은 똑같아도, 생긴 모양 때문에 영 이상하네.” 그 순간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된장찌개 두부를 한 숟가락 집어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니, 된장찌개가 어때서. 두부도, 호박도 평상시처럼 맛만 좋은데. 두부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오늘 저녁 민준이가 직접 가게에 가서 사온 거란다. 또한, 열심히 일한 아빠, 그리고 시험을 위해 공부하고 온 형과 누나를 위해 엄마가 보는 가운데 식탁에서 민준이가 직접 두부를 썬 거야. , 대견하지 않니? 두부가 약간 울퉁불퉁하지만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잖아? 우리 막내의 정성이 들어가니까 정말 정말 맛있다. 그렇지, 여보?” 아버지는 어머니의 물음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잠시 나를 보시더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셨고 어머니도 말씀을 마치신 후 나에게 빙그레 웃어 주셨다. 눈 내리는 저녁, 우리 가족은 온갖 웃음꽃이 피어나는 화목한 식사를 오랫동안 즐겼다.

 

가만히 눈을 감고 회상해 보니 벌써 3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런데 그 사건은 지금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자식의 자존심을 살려주시기 위해서 어떤 허물도 기꺼이 감싸주시며 무척 헌신적이고 자애로우셨던 나의 어머니.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나 역시 한 가정을 이루면서 가장으로서 나의 가족들에게 그때 어머니로부터 배운 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곁에 계시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신지 오래됐지만 그때의 일만 떠올리면 보고픈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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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중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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