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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23 야채대신 사랑을 파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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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대신 사랑을 파는 할머니

 

 

 

차디찬 빗방울이 갑자기 후드득 떨어졌다. 저녁 퇴근길 무렵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없었기에 예상치 않은 가을비였지만 그저 옷이 약간 젖을 정도였다. 오늘 오후 맞벌이 아내가 회사에서 처리할 일들 때문에 조금 늦을지 모르니까 반찬으로 쓸 야채거리를 사오라고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육교를 지나치는데 할머니 한분이 다리 한편에서 쑥갓과 각종 산나물, 고사리 등을 팔고 계셨는데 저녁이 다 되어선지 그렇게 많은 양의 야채가 남은 것은 아니었다. 비도 간간히 오고 있어서 저 멀리 돌아 슈퍼에 갔다 오느니 곧장 집으로 가는 길에 할머니로 부터 야채를 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비를 맞고 계신 할머니도 안쓰러워 보였고 날도 어두워지는데 빨리 하나라도 더 팔고 들어가시도록 도와드리고 싶었다.
"
할머니? 이 야채들 얼마에요? 제가 적당껏 사려고요. 오늘 저녁 반찬거리가 필요해서요." 내가 관심을 보이며 묻자 할머니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하셨다. "총각, 이 야채들은 팔지 않을 거유. 아침부터 조금씩 팔고 이제 얼마 남진 않았지만 이젠 팔면 안 돼. 미안하지만 다른데 가서 사요."
뜻밖의 할머니의 대답에 나는 약간 놀랐다. '그렇다면 남은 야채를 팔지도 않는데 왜 짐을 정리해서 들어가지 않고 비를 맞으면서까지 육교에 계시는 걸까? 그것도 아직 여러 번 팔 수 있는 야채가 바닥에 남아있는데.' 그렇게 혼잣말로 의아해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할머니는 이내 말을 이어갔다. "미안해요, 젊은이, 다른 건 못 주는데 이 콩나물이라도 조금 가져가요. 오늘 저녁에 국 끓여 먹는 데는 쓸 수 있을 거야. 비도 내리는데 그냥 가져가." 봉지에 싸주시는 콩나물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든 후 돈 이천 원을 건넸는데 할머니는 한사코 받지 않고 뿌리치셨다.

 

 

고맙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해 가려는데 웬 모자를 눌러쓴 남자 한명이 할머니에게 다가왔다. 먼일인가 싶어 잠시 지켜봤는데 할머니는 남은 모든 야채들을 싸서 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뿐만 아니라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도 함께 건넸다. 아마 오늘 벌어들인 돈 전부인 것 같았다.
'
아니, 왜 힘들게 번 돈을 저 사람에게 주는 거지? 혹시 말로만 듣던 자릿세를 받아가는 사람이 아닐까?'라고 수상히 여기면서 자세히 지켜봤는데 왠지 그 사람이 눈에 익었다.자세히 보니 딸내미가 주말에 가끔 봉사활동을 하는 천사원에 있는 사무처 직원이었다.

 

 

그 직원이 육교를 내려올 때 나는 옆에서 넌지시 인사하면서 물었다.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야채 파는 할머니를 잘 아시나 봐요?” 그러자 그는 , . 할머니가 우리 천사원 아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야채거리를 일주일에 두세 번 주신답니다. 이제는 본인 몸도 불편하실 나이인데 직접 가꾼 밭이나 산에서 각종 나물을 캐 오셔서 저희들에게 가져다 주시지요. 뿐만 아니라 그날 야채를 판 돈까지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주신답니다. 한사코 뿌리쳐 보기도 하고 거절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계속 찾아오셔서 막무가내로 건네주시고 가시니. 그래서 천사원이 있는 먼 길까지 오시지 않게 하려고 제가 이렇게 저녁 시간에 맞춰서 나오는 거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더욱 궁금해져서 할머니가 이렇게 기부하시는 데는 무슨 남다른 사연이라도 있으신가 봐요?”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혼자 사시는데 아마도 예전에 미혼모셨나 봐요. 혼자 아이를 낳아서 기를 형편이 안 되자 그 갓난아기를 여기 천사원에 맡긴 후 멀리 입양을 시키셨대요. 나중에는 아기를 버렸다는 죄책감과 우울증까지 겹쳐서 자살까지 시도하셨다는 군요.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못 다한 아이의 몫까지, 살아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어렵고 힘든 어린 아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시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답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물론 어린 시절 입양 보낸 자신의 아이에게 혹시 연락이 닿게 되면 알려달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고요. 벌써 저렇게 천사원을 도와주신지도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굴복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희망과 행복을 주기 위해 애쓰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할머니를 육교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가운 목소리로 먼저 인사드리고 이것저것 나물을 사드리면서 정겨운 말벗이라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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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중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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